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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서 책을 못 읽는다고 하시는 분들, 혹시 반대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책을 안 읽어서 바쁜 건 아닐까요. 저도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하루 30분씩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 말이 왜 맞는지 몸으로 느끼게 됐습니다. 생각이 정리되니까 행동도 정리됐고, 행동이 정리되니 시간이 생겼습니다.
지성의 폐활량, 복잡한 문제 앞에서 드러나는 차이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지식의 양이 아닙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태도에서 갈립니다. 일본 작가 우찌다 타츠루가 만든 개념인 지성의 폐활량(知性의 肺活量)이란,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거나 조급해지지 않고 다양한 대안을 하나씩 검토해나가는 지적 인내심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머릿속이 꽉 차 있어도 침착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건 꽤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책을 꾸준히 읽던 시기에는 업무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도 일단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반면 한동안 책과 멀어졌을 때는 같은 상황에서도 훨씬 빠르게 초조해졌고, 판단이 흐려졌습니다. 숨이 짧아진 것처럼요.
뇌과학 분야에서도 이와 관련한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독서를 통해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즉 판단·계획·집중력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전전두엽이란 인간이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상황을 분석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뇌의 핵심 부위입니다. 실제로 Nature npj Science of Learning(2020)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꾸준한 독서 활동은 뇌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밝혀졌습니다. 신경 가소성이란 뇌가 새로운 정보와 경험에 반응해 스스로 회로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1년에 300권을 읽었다는 분들을 간혹 봅니다. 저는 그 숫자보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같은 책을 속독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저자가 숨겨놓은 의미를 파고드는 과정, 그 불편함을 버티는 것 자체가 지성의 폐활량을 키우는 훈련입니다.
언어의 해상도, 내 생각을 얼마나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언어의 해상도(Language Resolution)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얼마나 정밀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좋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흐릿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차이처럼, 같은 감정이나 생각도 사람마다 표현의 선명도가 다릅니다.
솔직히 이건 제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실감한 변화였습니다. 예전에는 무언가 답답하거나 기쁜 감정이 있어도 "좋다", "별로다" 수준에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책을 꾸준히 읽다 보니 감정을 쪼개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불안'이 아니라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라고, '기쁨'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뤄뒀던 일이 마침내 맞아들어가는 안도감'이라고 표현하게 됐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동원할 수 있는 어휘가 줄어들고, 어휘가 줄어들면 생각 자체도 단순해집니다. 언어가 사고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 분야에서도 주목하는 부분입니다. 인지언어학이란 언어와 인간의 사고 방식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더 풍부한 언어를 가진 사람일수록 더 정교하게 세상을 인식한다고 봅니다.
책을 고를 때도 저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습니다. 서점에 가면 먼저 제목을 봅니다. 제목이 마음을 당기면 저자 소개를 확인합니다. 이력이 특이하거나 삶의 결이 느껴지는 저자라면 목차를 펼칩니다. 목차가 새로운 시각을 담고 있으면 프롤로그를 읽습니다. 이 과정에서 카드를 긁게 됩니다. 이것도 어쩌면 언어의 해상도가 높아진 덕분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뭐가 좋은 글인지, 뭐가 날카로운 문장인지를 이제는 어느 정도 감으로 알 수 있게 됐으니까요.
책 읽기와 언어 표현력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어휘력이 늘면 감정과 상황을 더 정밀하게 구분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 표현이 정밀해지면 글쓰기뿐 아니라 말하기와 설득력도 함께 올라갑니다.
- 설득력이 올라가면 직장, 관계, 협상 등 삶의 실제 장면에서 유리해집니다.
-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꾸준한 독서 습관 하나입니다.
복독, 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복독(複讀)이란 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독서법을 말합니다. 단순히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나이와 경험이 달라졌기 때문에 동일한 문장에서도 전혀 다른 울림을 발견하게 되는 방식입니다.
『어린 왕자』를 10대에 읽을 때와 30대에 읽을 때, 과연 같은 책일까요. 저는 같은 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20대에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한 동화처럼 느껴졌던 구절이, 30대 중반에 다시 펼쳤을 때는 가슴 한쪽을 찌르는 문장이 됐습니다. 독자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을 한 번 완독한 뒤에 마음에 남은 문장 5가지를 따로 손으로 적어두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타이핑보다 손으로 쓰는 게 확실히 기억에 더 오래 남습니다. 나중에 그 책을 다시 펼쳤을 때 메모해둔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면, 처음 읽었을 때의 맥락과 지금 내 상황이 겹치면서 새로운 연결이 생깁니다. 이게 단순한 복습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의 확장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의미 있지만, 저는 한 권을 깊게 여러 번 읽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변화를 만든다고 봅니다. 1년에 300권을 읽는 방식과 10권을 30번 읽는 방식 중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는 없습니다. 다만 제 경우에는 두껍고 어려운 책 한 권을 한 달에 걸쳐 하루 30분씩 조금씩 읽어나가는 방식이 더 잘 맞았습니다. 그렇게 완독한 책이 머릿속에 훨씬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어려운 책을 포기하지 말라는 조언도 이 맥락에서 나옵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첫 장에 나오는 '영원회귀(Eternal Return)'라는 개념을 모르면 책 전체가 흐릿하게 보입니다. 영원회귀란 동일한 사건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니체의 철학적 개념으로, 쿤데라는 이것을 삶의 무게감과 연결시킵니다. 이 개념 하나를 붙잡고 천천히 읽어나가면, 처음에는 막막했던 책이 어느 순간 자기 이야기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록된 독서 교육 관련 다수의 논문에서도, 난이도 있는 텍스트를 반복 독해하는 훈련이 비판적 사고력 향상에 효과적이라는 결과를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책 읽는 습관을 만들고 싶은데, 처음에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까요?
A. 처음부터 어렵거나 두꺼운 책을 고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목이 마음을 당기는 책, 저자의 이력이 조금 특이한 책을 서점에서 직접 골라보시길 권합니다. 프롤로그를 읽고 끌리면 그 책이 지금 나에게 맞는 책입니다. 책이 나를 고르는 시점이 따로 있다고 봅니다.
Q. 바빠서 독서할 시간이 없는 건 사실 아닌가요?
A. 이 부분은 저도 처음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철 이동 시간 5분, 약속 전 대기 시간 10분을 쌓다 보니 한 달에 한 권이 됐습니다. 바빠서 못 읽는다는 생각도 있지만, 실제로 써보니 자투리 시간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독서 습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을 어디에 쓸지의 문제였습니다.
Q. 책을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는데, 읽는 의미가 있을까요?
A. 기억보다 중요한 건 사고 회로가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 못해도 그 영양분은 몸에 남듯, 독서도 내용 하나하나보다 사고방식 자체에 영향을 줍니다. 저는 읽은 뒤 마음에 남는 문장 5개를 손으로 기록해두는 방식으로 기억의 휘발을 줄이고 있습니다. 기록은 남지만 기억은 날아갑니다.
Q.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큽니다.
A. 책을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고정관념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도 읽다가 맞지 않으면 덮어두고, 몇 달 뒤에 다시 펼쳤을 때 술술 읽히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지금 읽기 힘든 책은 지금 내가 그 책을 소화할 준비가 안 된 것일 수 있습니다. 부담을 내려놓는 것 자체가 독서를 지속하는 방법입니다.
Q. 복독이 효과가 있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지난 뒤 같은 책을 다시 읽어야 할까요?
A. 정해진 공식은 없습니다. 다만 삶의 환경이나 고민이 달라진 시점에 다시 읽었을 때 가장 다르게 읽혔습니다. 1~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면 그때가 좋은 타이밍이라고 봅니다. 메모해둔 문장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는 순간, 처음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연결이 생깁니다.
독서가 삶을 바꾼다는 말, 저도 처음엔 막연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30분이라는 작은 습관이 쌓이고 나서야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지성의 폐활량이 두꺼워지고, 언어의 해상도가 높아지고, 같은 책에서 다른 풍경을 보게 되는 것. 이 세 가지 변화는 1년에 책 몇 권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느냐에서 결정됩니다. 오늘 딱 한 문장만 읽어보시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